도그빌(Dogville, 2003)

누군가가 추천을 해 주었고, 교보에서 DVD를 할인하여 팔길래 구매를 하여 보았다. 이 영화를 보고 한 단어가 계속 맴돌아서 그에 대한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인간의 추악함과 오만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감싸고 있는 형태에 더 눈길이 갔다.

(스포일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시작은 ‘톰’의 주민회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주민들에게 도덕적 가르침을 위하여 그는 ‘실례(illustration)’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실례를 찾기 어려워했고 때마침 선물과도 같이 ‘그레이스’가 마을로 들어오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와 마지막에서 이 영화 전체가 커다란 실례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영화 자체가 실질적인 장소에서 촬영 된 것이 아니라 세트장에서 촬영이 되었고 세트장은 최소한의 시각적 가이드만 존재한다. 굳이 세트장을 이용한 이유는 마을의 실례를 표현하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 더 넓게는 이 영화가 커다란 실례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영화 내내 그레이스가 톰, 그리고 도그빌의 실례인것 처럼 보이지만 결말에서는 오히려 톰이 그레이스의 실례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실례는 시간적 미래의 개념을 내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톰이 실례를 원했던 이유는 마을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서이고 또한 자신의 소설을 위해서 였다. 둘 다 미래의 실전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실례는 이후에 유사한 사건이 존재 해야지만 의미가 있다. 허나, 톰 그리고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 실례의 주체가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톰은 실례를 통하여 미래의 일을 대비하고자 했지만 그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례가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톰의 생각에 그레이스는 실례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관용을 베풀지 않아도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 했을 것이다. 예시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실례처럼 다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 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영화는 하나의 실례이다. 비단, 이 영화 뿐만이 아니라 영화, 아니 영화를 넘어 대부분의 예술 작품들이 현상과 개념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화는 실례이고 우리의 현실은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허나, 우리 스스로가 톰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단지 영화의 내용은 실례일 뿐이고 우리는 이 영화를 교훈삼아 현실에 적용일 시키면 되는 것인가? 만약 영화가 실례가 아니라 현실이라면, 우리의 죽음은 그리 멀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교훈적인 영화다.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국 톰과 그리 다르지 않다. 왜냐면 이러한 자세는 톰이 그레이스를 실례로 생각 했듯이, 영화를 실례로 밖에 이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현실로써 받아 들여야 톰을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현실속에 있는 도그빌을 찾아내고 불태우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능동적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영화는 예시가 아니다. 현실이다.

이 영화를 보고 생각난 음악이 하나 있다.

분명 이 음악은 우리 사회의 단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전체가 아니다. 그리고 오디오 속에 갖혀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례로 받아들이고 거리를 둘 수 있다. 하지만 톰에게 그레이스는 실례가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s. 실례의 의미는 단지 예술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더 넓게 생각한다면 공학적 해법들도 실례에 해당한다. 그 이유는 논문, 튜토리얼, 메뉴얼 등의 공학적 솔루션들은 미래에 일어날 실질적인 사건을 돕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논문, 가이드 등의 내용에서 담고 있는 내용이 앞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안에 있는 솔루션들은 의미가 없어진다.

p.s. 니콜 키드먼은 영원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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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페이스북에는 ‘싫어요’가 없을까?(혐오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페이스북에는 ‘싫어요’ 버튼이 없다. 좋아요 뿐이다. 가끔 싫어요 버튼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한다. 왜 페이스북에는 싫어요 버튼이 없을까?

내가 답을 알아서 질문을 하는게 아니다. 난 페이스북에 다니지도 않고 그와 관련된 연구를 해본적도 없다. 나도 몰라서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페이스북은 사람들이 뭘 싫어하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페이스북이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좋아하는 것들을 더 보여주거나 싫어하는 것들을 더 안보여 주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전자의 방식은 당연히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즐겁게 이용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후자의 방식은 잘 해봐야 본전이다.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싫어하지 않게 만들어 줄 뿐 좋아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어차피 한정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는 타임라인을 구성 할 때 좋아하는 것들 뽑아서만 보여줘도 효과적일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페이스북이 이렇다고 치자. 이 이야기를 일반적인 인터넷 공간에 확장시켜 보고 싶다.

인터넷에서 혐오 표현이 만연해 진 것은 하루 이틀 전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악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악플은 실제로 사람을 죽였고, 많은 이들을 아프게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악플의 양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악플들이 개인을 향한 것이 었다면 지금의 악플은 집단을 향하고 있다. 특정 지역의 사람들을 혐오한다거나, 특정 정치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최근에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더 일반적으로 자신과 반대의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조금 다른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혐오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혐오가 이제 시작이 되었다기 보다는 인터넷 상에서 이제 두드러지게 보이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지역 혐오, 정치색 혐오, 여성/남성 혐오, 동성애 혐오등이 대표적인 예시들일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 목청껏 소리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는 제약이 있어야지만이 존재 할 수 있다. 제약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내 생각에 자유의 끝은 타인의 자유를 해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경우에는 나의 자유는 경계를 넘은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이야기 하는게 어떻게 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지 궁금하다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학교의 왕따가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면 내가 정말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혐오 표현의 자유는 없다. 하지만 이게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난 클래식이 싫다. 하지만 내가 클래식을 싫어한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의 자유가 침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동성애자를 싫어한다고 이야기 하면 그건 동성애자들의 자유를 침해한다. 그들은 사람이고 그러한 혐오 발언에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다르게 이야기 하면 내가 싫어하는 것의 대상이 사람이 된다면 그 말을 할 자유는 상당히 줄어 들게 된다.

동성애자들, 여성들이 싫은게 아니라 그들이 하는 행동이 싫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은 이미 예전에 넘었다. 대표적인 혐오들에 대해서 하나 하나 이야기를 해보겠다. 동성애는 선택의 여부가 아니다. 개인에게 내제되어 있는 것이고 동성애가 싫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싫다고 하는 것과 같다. 지역 혐오 역시 선택의 여부로 결정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말이 되지 않는다. 여성 혐오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가 있다. ‘김치녀’, ‘된장녀’등의 단어들이 그 예시이다. 이런 단어들은 특정 행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혐오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정치 혐오도 마찬가지다. ‘빨갱이’,’수꼴’,’좌좀’등의 용어들은 특정 정치 세력들을 비난할 때 나오는 말들인데 명백하게 그들의 행동과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 자체를 지칭한다. 혐오의 대상이 명백히 사람이라는 증거다.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나는 ‘김치녀’고 ‘빨갱이’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임으로써 나의 행동과 생각과 별개로 나라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을 싫어 할 수 있지 않냐라고 반문 할 수 있다. 나도 싫어하는 연예인이 있고 싫어하는 정치인이 있다. 하지만 그 경우는 해당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심한 잘못을 했을 경우이다. 동성애자들이나 여성들은 어떠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리 심한 잘못을 하지 않는 정치인을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해당 정치인을 싫어한다기 보다는 그 사람의 정책들을 싫어하는 것이다. 현 정부에 대한 비판들이 대통령이 싫어서 그런게 아니라 대통령의 정책이 싫어서 그런것이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이러한 의미에서 뉴스에 댓글은 대체 왜 있는지 모르겠다. 긍정적인 피드백 채널의 역할을 하지 못함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피드백도 제대로 전달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뉴스에 댓글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이래나 저래나 페이스북에는 싫어요가 필요가 없다. 있다고 해도 부정적인 결과만 낳을 것이다. 유투브에는 싫어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해야 할 것은 유투브에서 ‘싫어요’를 누르는 것은 해당 동영상이 싫음을 표현하는 것이지 동영상을 업로드 한 사람을 싫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대상이 사람인 경우에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우리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자유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하지 말자.

망원동 인공위성(The Basement Satellite , 2013)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역린> 등 많은 영화들에서 촬영을 담당 하셨던 김형주 감독님의 첫 연출작이다. 그리고 예술가 송호준의 첫 주연작이 되겠다. 그리고 내가 처음 참가해본 영화 시사회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다. 영화 상영 전에 (어떤 분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재미있는 영화라고 소개를 하셨었는데, 왜 재미가 있을지 몰랐다.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생각하고 갔기 때문이다.

결론 부터 이야기 하자면 재밌다. 그리고 웃기다.

영화는 예술가 송호준이 자신의 개인 인공위성 프로젝트 OSSI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다. 송호준의 프로젝트에 대해서 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를 하지도 않고 프로젝트 이후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프로젝트와 같이 시작하고 같이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가 그리 보기 편하지만은 않았다. 영화속에서 송호준은 프로젝트를 진행해 가면서 상당히 괴로워한다. 그 모습을 보는 관객은 같이 괴로워진다. 영화 속에서도 스스로 이 프로젝트를 왜 하는지 의문을 품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본 사람들, 아니 그의 프로젝트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왜 하는지 이해를 충분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OSSI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프로젝트 전체를 하나의 예술로 인지하고 있었다. 행위 예술과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크게 두가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는 ‘원동력’이고 하나는 ‘성공(혹은 사람)’이다.

그가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작은 흥미를 가지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 한것으로 보인다. 흥미의 크기가 절대적으로 작다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크기에 비해서 흥미가 작았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되고 스스로 계속 되묻는다. 난 이것을 대체 왜 하고 있는가? 나 역시도 나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끝을 낸 것 보다 끝내지 못한 것이 훨씬 많다. 끝나지 못한 프로젝트는 ‘난 이것을 대체 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그러게, 할 필요가 없네’라는 답을 한 프로젝트들이다. 한다고 누가 나를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실적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난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는 후회와 함께 언젠가는 다시 해야지 하는 다짐이 남아 있다. 영화에서도 송호준은 돌이라도 띄우겠다고 했다. 실제로 돌을 띄워도 됐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지막날까지 작업실의 불을 끄지 않았다. 대체 왜 그랬을까? 영화에서 송호준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즐거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공감이 많이 되는 말이다. 하고 싶은거 한다고 다 즐거우면 세상에 고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괴로운 일을 대체 우리는 왜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의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후회에서 찾고 싶다. 이 다큐멘터리 처럼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다. 내가 이걸 못했다니. 내가 이걸 실패했다니. 조금만 더 노력해 볼껄. 송호준이 돌을 올리지 않은 이유도 그가 돌을 올렸다면 이런 생각들에게 사로 잡힌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를 보고 얻은 것이 있다면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OSSI 프로젝트를 공학적인 잣대로 평가 해야 한다면 실패일 수 밖에 없다. 공학에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명확하다. 대부분의 경우 요구 되는 조건들을 만족 시키는가 아닌가인데, 그의 인공위성은 교신에 실패했다. 하지만 과연 이게 정말 실패인가? 그가 예술가이기 때문에,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가 아니라 공학자가 하는 공학 프로젝트가 실패하더라도 실패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의 실패는 맞을 것이다. 하지만 공학자의 실패는 아니다. 결과의 실패인거지 사람의 실패는 아니라는 것이다. 과정에서 배운게 없어도 괜찮다. 실패와 성공이라는 수식어는 사람에게는 쓸 수 없는 수식어 인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단지 프로젝트에만 한정 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인생으로 확장이 된다. 분명 그러한 연출적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즐거움도, 행복도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성공과 실패로 구분 할 수도 없었다.

위에서 영화의 의미를 확장 하긴 했지만 난 영화나 소설을 보고 일반화 해서 의미를 찾는 것을 싫어한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떠나서 과도한 일반화는 작품들에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고 스스로 감동 받는 것은 상관 없으나 개인의 감동을 확장하여 인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감동을 받지 않는 타인들을 작품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싫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의 감동을 인생 전체로 확장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쪽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영화를 인생 전체로 확장할 수 밖에 없다. 이게 바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보편성인가보다. 강신주의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시와 관련 지어서 나온다. 그리고 수업 들을때 인문학과 교수님께서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다. 이야기가 개인적이고 세세할 수록 더 강한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나 역시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하는 것 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바꾼 이유도 이것이다. 우리는 송호준의 개인적인 OSSI 프로젝트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영화를 보러 가기 직전에 이런 트윗이 올라 왔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런 트윗을 보니 조금 찜찜한 감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왜 반기지 않는지 조금은 알것 같았다. 영화의 연출상 의도인거 같긴 한데 송호준의 모습을 조금 과하게 희화화 하고 있는것 같았다. 마치 조롱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의 프로젝트를 깎아 내리지도 않고 지나치게 미화 하지도 않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본다고 해서 송호준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주입 받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굉장히 짧은 순간인데 코끝이 찡했던 장면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송호준의 영상을 보면서 박물관 직원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었는데, 그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과학자가 되어서 우주에 갈 수도 있지만 예술가가 되어서 우주에 갈 수 있다고. 우리 모두가 우주에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p.s. 음악이 상당히 좋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American Sniper , 2014)

처음 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영화인것 같다. 영화를 정말 잘 보지 않는다는걸 새삼스래 깨달았다. 영화를 스스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된 뒤에 나온 그의 영화들은 딱히 나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좀 달랐다. 예고편의 승리라 말 하고 싶다. 예고편 만으로도 한편의 영화가  완성 되었다. 이야기 전체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으면서 굉장한 긴장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라크 전쟁의 의미, 전쟁과 평화를 떠나서 이 영화는 한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 카일에 대한 묘사를 하라고 하면 아마 이런 식으로 할 것 같다. 애국심이 전부인 보수적인 미국 백인 군인.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크리스 카일에 대해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도 되는 거냐고 되물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함부로 그에게 그런 질문을 되물을 수 없게 된다.

그가 입대를 하는 이유도, 자꾸 전장에 나가는 이유는 굉장히 단순하다. 그리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 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그에게 함부로 생명의 중요성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예고편에도 나오지만 그가 전장에서 갈등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의 머릿속이, 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지 조금 가늠 할 수 있었다. 조국과 동료를 위하여 누군가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소중함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반대할 것인가. 그 누구도 쉽게 선택 할 수 없는 선택지다. 그리고 이 선택지는 어느 것을 선택 하더라도 고통이 뒤따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선택지 중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전쟁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반전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크리스 카일은 선택했다. 그는 대부분은 하지도 않는 선택을 굳이 하여 고통을 받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겁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택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조롱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가볍게 여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우리들의 고통을 대신 견뎌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가볍게 이야기 할 수 없다. 내가 반전 운동을 하면서 다른 한쪽의 고통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나 역시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마 선택을 한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그렇게 쉽게 판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크리스 카일의 일대기를 그린다다. 물론 전쟁 기간에 초점이 맞춰지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동생을 사랑하는 형이었고, 한 가족의 든든한 가장이었으며, 누군가의 사랑이었다. 이런 그를 한 문장으로, 몇 개의 단어로 판단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 위에서 단순한 사람으로 보인다고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여러 역할을 해야 하는, 복잡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몇 개의 문장으로 그를 이야기 할 수 없기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관점을 바꿔서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에 유럽에서 IS로 인한 테러가 일어났다. 그들의 행동이 잘못 된 것은 맞지만 테러리스틀 개개인에 대하여 우리가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범죄와 범죄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하기도 하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는 선택을 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무언가가 악일 수도 있고 그 방법이 잔인한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 백명이 넘는 적을 사람을 죽이면서 고통받았던 크리스 카일에 대해 쉽게 말하기 힘든 것 처럼, 목숨을 버리면서 고통 받은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차마 그들이 받은 고통을 조롱 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해치는 행위들에 대해서도 비판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부분 큰 규모의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을 수반하는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 했으나 그가 크리스 카일과 같은 고통을 받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테러를 기획하고 지시하지만 행동하지는 않는다. 나는 비판의 화살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게 더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사건을 일으켰지만 고통을 받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조롱할 고통이 없다.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국제시장>으로 촉발된 좌우의 싸움과  비슷한 싸움이 <아메리칸 스나이퍼>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듯 하다. 영화를 보면 그런 싸움이 안 일어날 수 없다는 생긱이 든다. 국제 시장을 보지 않았으니, 그리고 볼 생각도 없으니 예고편만을 가지고 간단히 이야기 해보겠다. 참고로 이 차이는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고 보통 예고편과 영화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국제시장> 예고편은 메세지가 명확하다. 힘들었지만 아름답다. 하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 예고편은 한 인물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100명이 넘는 적을 사살한 스나이퍼가 아이를 쏴야 하는가 마는가 고뇌한다. 여러 각도의 해석이 필요한 사건들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국제시장>이 오락영화라기 때문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뛰어난 이유가 있다.

p.s. 아 시에나 밀러!

p.s. 조롱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과장이 아니냐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목숨을 거는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 비해 그 일에 수반되는 고통은 너무나도 무겁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 대한 조롱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한 죽음에 대해서도 가볍게 이야기 할 수 없다.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 The Lovers On The Bridge , 1991)

난 원래 옛 영화들을 잘 보지 않는다. 지금 나오는 것들을 소화하기도 벅찬데 예전 것들 까지 챙겨 보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퐁네프의 연인들은 한번 보고 싶었다. 신기한 것은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제목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내가 태어날 적에 나온 영화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영화를 꽤 오랫동안 제목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 대한 신비감 같은 것이 있었다. 다른 영화들 보다 더 궁금했던 것이다. 운이 좋게도 최근에 재개봉을 하여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영화를 보고 든 내가 기존에 영화라는 포맷에 너무 갖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그래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꽤 많은 장면들이 이야기를 진행 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기 보다는 두 남녀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장 명확한 장면은 다리 위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장면이다. 이 전에 내가 어떤 영화들에 대해서 지루하거나 어렵다고 느끼는 적이 많았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영화들은 주로 장면들이 영화의 내용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것 같다. 하지만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고나서 영화가 단순이 이야기를 표현하기만 하고 내용은 이야기 안에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 이외에 굉장히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는 날것 상태의 사랑이다. 사랑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분위기가 대체로 거칠다. 단지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들이 그렇다. 열정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는데 난 날것의 느낌이 많이 났다. 영화 속에서 알렉스가 미셀에게 생선을 훔쳐서 회로 주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날생선이 생각이 났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느낌과 굉장히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내내 전혀 가공되지 않고 익혀지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랑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이고 아름다운 장면들도 많지만 그렇게 마음이 따뜻해 지는 영화는 아니다. 비릿한 생선을 먹고 나온 느낌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비슷한 영화들을 더 찾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p.s. 내가 다시 레오 까락스 감독의 영화를 볼지 잘 모르겠다. 홀리모터스가 난해한 영화라고 해서 볼까 말까 계속 고민중이었는데 더 안보게 될 것 같다.

p.s. 불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뭔지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글렌체크를 위하여

글렌체크를 위하여

이 글 역시 생각이 터져 나와 참지 못해 쓰게 된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글렌체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보니 사람들이 글렌체크의 음악을 ‘식상하지만 잘 만들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식상하다는 의견에 동의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글렌체크를 너무나도 좋아하기에 그와 비슷한 음악이 있기를 간절하게 원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글렌체크와 비슷한 음악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글렌체크와 유사한 음악이 있는가? ‘, ‘글렌체크의 음악은 어디서 부터 비롯 되는가?’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아 보고 싶었다. 이 글은 그 과정에 대한 글이다.

먼저 비슷한 음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하고 갈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 비슷한 음악이라는 것은 구분하기 힘든 음악이다. 즉, 어떤 두 아티스트가 비슷한 음악을 한다는 것은 특정 음악을 들었을 때 이 음악이 누구의 음악인지 알아 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보컬의 목소리 때문에 알아 맞출 수 있다. 그래서 더 명확히 하자면 두 아티스트가 비슷한 음악을 한다는 것은 두 아티스트의 것이 아니라 제 3의 음악을 들었을 때 이 음악이 어느 아티스트의 음악에 더 가까운지 판단하기 힘들 때 두 아티스트가 비슷한 음악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실제로 비슷한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있는지 먼저 확인 해 봐야 할 것이다. 애초에 비슷한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조건 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이 있다. 주위 사람들이 내가 EDM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는 House 음악이다. 넓게 이야기 하자면 그렇고 좁게 이야기 하자면 French House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한다. 조금 다르게 이야기 하면 80년대의 Rave Music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맨 처음에 들은 House 음악은 House Nations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그 당시 그 음악을 듣고 처음으로 특정 장르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 Avril Lavigne에 빠져있긴 했지만 그건 아티스트를 좋아했던 거지 장르를 통째로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위키피디아에 Rave Music을 검색해보니 <Rhythim Is Rhythim – Strings of Life (Original Mix)>가 예시로 올라와 있다. 이 음악 역시 House Nations 시리즈 중 하나에 리믹스 버전으로 포함되어 있는 노래다. 그 때의 음악들이 다른 스타일로 리믹스 되고 있긴 하지만 80년대 House 음악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많은 아티스트들에 의해서 재생산되고 있는데 어떤 아티스트들의 음악은 누가 만들었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다.

일부러 시간적 차이가 좀  있는 두 아티스트를 골라봤다. 한명은 ‘Le Nonsense’이다. 홈타운은 페루이지만 속해있는 레이블들은 주로 이탈리아에 있다. 어린 프로듀서이며 현재 활동중이다. 다른 한명은 ‘Le Knight Club’인데 Daft Punk의 ‘Guy-Manuel de Homem-Christo’과 또 다른 아티스트인 ‘Eric Chedeville’이 만든 그룹이다. 두 아티스트가 활동한 시간이 좀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둘의 음악은 French House로 분류가 되지만 French House 자체가 80년대 Disco 음악들에 기반을 하고 있기 때문에 80년대 스타일의 음악으로 분류했다. 이 두 음악을 들어보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두 음악이 뚜렷하게 구분이 안될 것이다. 다른 시대에 나온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둘의 음악이 특색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자꾸 듣고 비슷한 음악들을 구분하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점들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단지 장르가 같기 때문에 유사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한 예는 같은 장르의 Justice의 음악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Le Nonsense’의 음악과는 전혀 다르다. 위에서 French House가 80년대 Disco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했지만 막상 들어보면 Justice의 음악은 그 당시의 음악들과 비슷해서라기 보다는 단지 프랑스 아티스트가 만들었기 때문에 French House라고 불리운다고 이야기 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Justice는 식상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Le Nonsense는 식상하게 들리 수 있다. 그 차이는 장르의 차이보다는 장르라는 커다란 음악의 기류에 얼마나 편승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Justice는 French House 내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독자적으로 구축 한 반면 Le Nonsense는 French House라는 기류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유사성을 수치화해서 나타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음악들을 비교해 가면서 얼마나 비슷한지 평가해 볼 수 는 있다. 글렌체크의 음악도 분명 어떠한 장르안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얼마만큼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지고 과연 글렌체크의 음악이 정말 식상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1. 리믹스 앨범의 아티스트들

먼저 가장 접근하는 방법은 리믹스 앨범에 참여한 아티스트의 음악들을 찾아 보는 것이었다. 글렌체크가 낸 공식적인 리믹스 앨범은 총 4장이 있다. 그중 최근에 나온 세장의 앨범만 살펴보자. Paint It Gold/Pacific/I’ve Got This Feeling Remix 앨범들인데 이 세개의 앨범은 2집 <Youth!>의 앨범에 있는 노래들을 다른 아티스들이 리믹스 한 곡들과 함께 발매한 앨범이다. 사실 리믹스 앨범이기 때문에 글렌체크의 음악 색을 완전하게 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글렌체크가 선정한 리믹스 곡들일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세 리믹스 앨범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은 다음과 같다.

Paint It Gold : Anoraak / Jean Tonique / Like Likes / Knuckle G
Pacific : Moullinex / Justin Faust / Les Loups / Glen Check
I’ve Got This Feeling : Kartell / Lorenz Rhode / Tesla55 / Cabinett

각각의 아티스트들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 해 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기 때문에 한 앨범에서 가장 글렌체크의 음악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한명의 아티스트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 보겠다. 그리고 한명씩만 봐도 무방한게 각각의 리믹스 앨범이 가지고 있는 색이 비슷해서 한 앨범에 있는 아티스트들의 음악들은 유사한 점이 많다.

Paint It Gold 앨범에서는 Anoraak이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다른 아티스트들의 경우 부드럽고 Deep한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된다면 Like Likes의 음악을 들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밴드이기 때문에 네이버나 멜론에서 들을 수 있다. 네이버에서는 Like Likes를 “UK Garage, Deep House 등의 Bass Music 기반으로 한 듀오이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들어보면 톡톡 튄다기 보다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Anoraak은 밴드적 요소가 많다. 글렌체크가 가지고 있는 구성과 다른 아티스트들에 비해서 더 유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렌체크와는 좀 다른 느낌이 있다. 오히려 Anoraak과 유사한 아티스트를 찾으라면 ‘Thieves Like Us’를 꼽겠다.

Anoraak의 음악보다 느리긴 하지만 음악이 가지고 있는 텍스쳐와 분위기는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즉 Anoraak도 글렌체크와 유사하다고 하기엔 다른 더 유사한 아티스트들이 많다.

Pacific과 I’ve Got This Feeling 앨범에 있는 아티스트들은 사실 글렌체크와 거의 유사성이 없다. 모두 위에서 말한 French House 아티스트들인데 색이 많이 다르다. 세명의 아티스트중에 가장 유명한 Moullinex, Kartell의 노래를 들어보면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글렌체크가 가지고 있는 밴드의 느낌은 전혀 없다. 물론 글렌체크가 French House 음악들로 꾸며진 디제이 셋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이런 믹스셋과 더불어서 리믹스도 내곤 한다.

이런 것들로 봐서 분명 French House와 80년대 사운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명하나 그들이 정규 앨범에 담는 음악들은 분명 다른 음악이다.

2. 장르로 찾아본 유사 음악들

글렌체크로 검색을 해보면 그들의 음악을 위키 에서는 신스팝이라고 하고  엔하위키에서는 ” 프랑스 일렉트로 하우스 밴드들의 영향을 받아 이와 유사하되 좀 더 강렬하고 록킹한 음악”이라고 한다. 그럼 신스팝 혹은 French House 둘 중 하나인것 같다. 그럼 어떠한 아티스트들이 신스팝을 하고 있는지 보자.

위키를 찾아보면 신스팝 아티스트들의 목록이 나온다. 굉장히 많다. 근데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르는 같지만 딱히 비슷한 음악이라고 하기 힘든 아티스트들이 많다. 이왕이면 지금 가장 핫한 아티스트들을 보자.

최근에 가장 이름이 많이 보이는 두 아티스트이다. 과연 이들의 장르가 정말 Synth Pop으로 구분되는지 보려면 BastilleChvrches의 빌보드 프로필을 봐도 좋다. 사실 Chvrches는 Electro Pop이라고 써있긴 한데 그게 정 찝찝하다면 Pet Shop Boys 음악과 비교해 보자. 하지만 Pet Shop Boys는 시대가 달라서 적절한 비교대상이 아닌것 같다. 어쨌든 이 두 밴드를 비교해 봐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신디사이저가 주가 되기 때문에 소리의 질감이 비슷할지는 몰라도 음악이 주는 느낌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음악을 장르로 구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물론 필요는 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같은 장르에 속해있는 다른 French House 혹은 Synth Pop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찾아서 듣는 걸로는 글렌체크와 비슷한 음악을 찾기는 힘들다.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사실 나는 French House와 Synth Pop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러나 이걸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3. 마구잡이로 떠올려보자

그냥 떠올리긴 힘드니까 지역적으로 좀 더 좁혀보면 어떨까? 가까운 일본에 비교 해볼만한 밴드가 있다. 사실 글렌체크가 Justice와 비슷하다고 이야기 할때 개인적으로는 80Kidz가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2인조 일렉트로닉 밴드이다. 위 곡은 매우 좋은 곡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글렌체크와 비슷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글렌체크가 더 밴드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고 더 펑키한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80kidz의 최근 앨범들을 들어보면 이 음악과는 색이 좀 다르다. 이 음악이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가져온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비교 해볼만한 밴드가 있긴 하다. 솔루션스가 개인적으로 비슷한 음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루션스는 글렌체크보다 좀 더 락 밴드 스럽다고 생각한다. 솔루션스가 글렌체크와 비슷할까 칵스와 비슷할까? 물론 개인적인 견해긴 하지만 솔루션스와 칵스가 묶이게 될 것 같다.

몇 아티스트가 물론 더 있긴 하지만 여기서 더 이야기 하는 것은 나의 짧은 음악적 소양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만 하도록 하겠다. 결론이 변하지는 않는다.

4. 관점을 바꿔서 글렌체크의 음악을 중점으로

그러면 글렌체크를 중심으로 두고 생각해 보자. 글렌체크의 음악들 중에서 다른 아티스트와 유사하다고 평가되는 음악들이 있었을까?

먼저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글렌체크의 <Cliché> 앨범이다. 이 앨범은 제목 때문에 더 Justice의 음악과 유사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본인들은 인터뷰에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했고 그들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단순히 팬이어서가 아니다. 아마 글렌체크가 새롭지는 않다는 이야기가 이 앨범에서 가장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들이 설명을 너무 잘 해놓아서 더이상 할 말이 없다.

 프랑스의 일렉트로닉 씬에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에는 funk와 disco를 기반으로 하우스 음악을 만드는 아티스트들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아 매주 새로운 아티스트들이 소개된다. 그 많은 아티스트들을 모두 Daft Punk와 Justice에 비교할거라면 이 장르는 발전이 없어야한다. … Daft Punk, Justice를 논하며 자기가 아는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것이라면 이 앨범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잘 만들어진 앨범이다. 전에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말했듯이, 하나하나 아는 것에 대해서만 말 할 거라면 모든 기타, 드럼, 베이스, 보컬 구성의 밴드를 The Beatles같다고 논하라고. (출처 : http://below.co.kr/magazine_interview/12303)

글렌체크가 말하는 대로 비슷하다고 차별성이 없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Sebastian은 Justice를 배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렌체크의 <Cliché>를 들었을 때 Justice가 연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걸 막을 수도 없고 그게 나쁜것도 아니다. 연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해야 할것 같다.

하지만 내가 누누히 글렌체크가 독보적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규앨범에 경우 이러한 유사함 조차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계속 ‘이 음악은 글렌체크와 다르다’ 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생각하고  있던 곡들은 모두 정규 앨범들에 있는 음악들이었다. 물론 내가 음악을 많이 들어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노래를 다 들어 볼 수는 없지 않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선에서 연상되지 않았고 그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French House와 Synth Pop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내지 못했다. 1집과 2집의 대표곡(이라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들을 들어보면 위에서 이야기 하던 음악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음악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곡의 구성이나 진행 방식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또한 그런 식의 비교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코드의 진행이 비슷하다던가 구성이 비슷하더라도 음악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 다르다면 전혀 다른 음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들로 음악을 비슷하다고 평가 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클래식은 하나의 음악이 되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처음부터 노래들을 직접 비교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유사한 노래를 찾으려고 노력 한 것이다.

이 두 글렌체크의 노래들과 위에서 언급했던 여러 French House, Synth Pop 음악들을 비교해 보자. 비교를 해본다면 분명히 글렌체크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머리속에서는 독자적인 카테고리로 분류가 된다.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소리의 텍스처와 음악의 감정 혹은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음악을 들을 때 영향을 많이 끼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 사실 나는 글렌체크의 대체재를 찾고 싶었다. 간절하게 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음악이 매일 매일 새롭게 나오는게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그들을 대신 할 수 있는 아티스트를 찾아 헤맸고 덕분에 지금은 French House와 Synth Pop을 즐게 듣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또 다른 글렌체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위에 있는 과정들이 나의 나름의 방법으로 글렌체크의 대체재를 찾기 위한 방법이었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둘째, 애정 때문에 쓰게 되었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인터넷에서 글렌체크의 음악이 새롭지는 않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답답했다. 글렌체크와 유사한 음악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나도 좀 듣게.

결론적으로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음악을 찾아서 들어왔으나 이 방법에도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글렌체크 예시를 통해 보았다. 하지만 덕분에 많은 좋은 아티스트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글렌체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이건 글렌체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음악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밴드들의 경우 대부분이 비교 불가한 음악들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생산해 내는 음악의 양에 부족함을 느끼고 계속 유사하지만 새로운 음악들을 찾아서 헤맨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우리가 원하는 음악을 찾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음악들을 만나게 되고 그것들을 좋아하게 될테니 큰 걱정은 아닌것 같다.

글렌체크와 유사한 음악이 있는가? – 내가 찾은 바로는 없다.

글렌체크의 음악은 어디서 부터 비롯 되는가? – 잘 모르겠다. 단순히 French House나 Disco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 혹시나 글렌체크와 유사한 음악이 있다거나 하면 누군가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 위에서 언급한 음악들과 유사한 음악도 누군가가 알려 주면 좋을것 같다.

로렌스 애니웨이 (Laurence Anyways , 2012)

이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진실한지 궁금했다.

감독이 뭣도 모르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감정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거짓으로 꾸며졌다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영화에 감정을 거짓으로 넣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니다. 특정 상황을 가정하고 그 안에서 어쩌면 극단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방향으로 인물들을 끌고 가는 상황이 많다. 그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영화나 소설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판단 할 수 있다. 즉 반대로 이야기하면 영화가 얼마나 거짓스러운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도 가능한가?

<로렌스 애니웨이> 역시 일어나는 사건들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은  보편적이다.  관객이 감동하고 공감한다는 사실이 보편적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로렌스이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인물은 프레드이다. 프레드가 있음으로 해서 영화가 주고자 하는 감정이 전달이 되고 영화 내에서 사랑이 완성이 된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내내 프레드에게 집중이 많이 되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은 프레드가 식당에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는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때 영화에서 감정을 거짓되게 꾸미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판타지물은 대표적인 거짓된 이야기다. 극단적인 살인 사건도 거짓된 이야기다. 하지만 거짓된 감정은 있을 수가 없다. 감정이 없거나 있는 것이다. 감정이 없는데 마치 있는것 처럼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중간계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고 엘프와 호빗도 없지만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없는데 있는 것 처럼 만들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괴물이나 세계를 영화 속에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감정은 영화 속에 담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감독이 느껴봤던 감정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담을 수 없다.

프레드를 보면서 내 마음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프레드가 사랑을 위해서 인내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사랑이 너무나도 격동적이어서 로렌스 때문에 쌓여진 껍질을 뚫고 나오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화속에, 그리고 화면을 넘어서 나에게도 실재한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느낌, 그리고 담고 있는 감정이 놀랍게 느껴졌다.

<로렌스 애니웨이>를 보고나니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떠올랐다. 단지 대사가 프랑스어라는 것 때문에 떠오른것은 아니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라서 그런것도 아니다. 사랑에 대해서 인물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도 영화에서 내뿜는 감정이 나를 찌르는듯한 느낌을 받아서 내가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이야기 하기는 힘들지만 통상적으로 내가 봐왔던 영화와는 달랐다. 원래 나는 영화를 두 번 보지 않는다.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선뜻 봤던 영화에 손이 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렌스 애니웨이>와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같은 영화들은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 장면에서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선뜻 다시 한번 볼 것 같다.

p.s.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화면이 가지고 있는 색에 놀라워 했고 나 역시 예고편을 볼 때는 그러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니 그런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p.s. (자비에 돌란이 프랑스 감독은 아니지만) 최근에 프랑스 영화를 몇 편 보게 되면서 프랑스 영화들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 얼마 전에 레오 까락스전이 있었는데 보지 못한 것이 갑자기 아쉬워진다.

p.s. 프레드 역할도 인상적이었지만 배우 쉬잔느 끌레몽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마미>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도 출연 했다고 했으니 봐야겠다. 나에게 영화를 선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감독도 아니고 장르도 아니고 배우다.